고려 대학교에 대해서~
고려대학교의 모태
고려대학교의 모태는 대한제국 내장원경 이용익이 1905년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다.
1932년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했고 1934년에는 안암동의 현재의 자리로 학교를 옮겼다.
1944년 일제가 학교 이름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변경했다.
광복 이후
종합대학으로 승격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의 흡수·합병
1945년 해방 후 교명을 보성전문학교로 환원하고, 1946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을 인가 받으며
동시에 보성전문학교를 고려대학교로 개칭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본교는 애기능 인근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이는 후일 이곳에 이공계캠퍼스가 자리 잡는 기반이 된다.
1971년 12월에는 1970년에 시작된 장기발전계획에 따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흡수 및 합병하였다.
반복적인 시위와 잦은 휴교 사태
1960년 4월 11일 3·15 부정선거와 관련한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 시신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하면서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들의 주도로 수많은 학생들이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을 요구하며 장외시위를 벌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매년 4월 18일에 4·18 의거로 기록하며 독재정권에 맞선 선배들의 정의로운 행동을 계승하기 위해 ‘4·18 구국대장정’ 행사를 연다.
구국대장정 행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연례 행사 단락을 참조하도록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휴교 사태가 빈발한 시기이기도 하다. 1965년 9월 4일에는 한일협정 반대시위 사태로 무기한 휴업 명령을 받았으며, 1971년 10월 15일에는 27일 간의 강제 휴교 조치를 동반한 교내 군 투입 및 위수령 조치를 단행하였다.
1975년 4월, 당시 정부는 유신헌법 철폐 시위의 중심이었던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긴급조치 제7호를 발동하였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독재정권을 향한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교육시설의 확충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중앙도서관 구관이 1935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개관한 데 이어 1975년에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앙도서관 신관을 신축하여 1978년 3월에 개관하였다. 1973년 10월 서독 정부의 무상원조에 의해 농과대학 캠퍼스를 준공하였고 1977년부터 활용 시작하였다. 한편 1978년 5월 착공한 기숙사를 1979년 11월에 준공하였고 이듬해인 1980년 3월에 개관하였다. 한편 당국의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에 따라 1980년 1월에 8개 학과, 초기 정원 400명 규모의 조치원분교 설립이 인가됐는데 이것이 현재의 세종캠퍼스가 탄생하는 계기이다.
2000년대 이후
졸업요건의 변화
200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화 되는 추세에서 고려대학교 졸업자의 실력은 세계적인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Global KU 프로젝트’ 등의 영향으로 졸업요건을 대폭 강화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2000년 3월 신입생부터는 졸업 인증제도로 TOEIC 및 TOEFL 등 공인영어시험 성적을 일정 수준을 얻어야 졸업이 가능하다. 2004년 3월 신입생부터는 한자 2급 수준으로 졸업요건을 신설했으나2011년 들어 일부 학과들이 이 요건을 폐지하였다. 또한 2004년 3월 신입생부터는 심화전공이나 이중전공, 연계전공, 이렇게 세 가지 항목 가운데 한 가지를 의무적으로 선택하여 학생설계전공으로 세분화하는 제2 전공을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
2005년은 고려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해였으며 같은 해 5월 5일에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2003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출범 및 지층에 7천평 규모의 1백주년 기념관에는 박물관과 디지털 도서관을 건립 하는 등 교내에서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추진했다. 한편 고려중앙학원에서는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3대 마스터플랜을 기획, 중앙광장과 백주년기념관, 화정체육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 가운데 중앙광장이 2002년 3월에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이후 백주년기념 삼성관과 화정체육관을 각각 2005년, 2006년에 건립했다.